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전쟁은 외면할수록 그 위험이 커진다. 유일하게 가능한 평화는 전쟁의 관리다.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의 작품 중 이런 제목의 소설이 있다.
그런데 大文豪(대문호)에겐 조금 결례되는 말이지만 전쟁과 평화의 실제 문제를 이해하는데 문학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학은 전쟁 속에 놓인 인간을 헤아리는 데는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그 법칙 자체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전쟁과 평화의 법칙은 문학적 감수성의 영역이기보다는 과학적 이해의 영역이다. 어떤 점에선 상식의 영역이라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외면당한 상식 말이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오히려 예외적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평화가 정상 상태이며 전쟁이란 그 평화가 어떤 이유로 깨어진 비정상 상태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실제로는 그 반대라는 것을 보여준다.
美 예일대 교수인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의 <전쟁과 인간>의 한 대목이 새길 만하다. (원제는 ‘On The Origin of War and The Preservation of Peace’인데 직역하면 ‘전쟁의 기원과 평화의 보존에 관하여’ )
케이건은 이 저서에서 어느 연구를 인용하여 “지난 3421년 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은 기간은 불과 268년”이라고 적시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은 일상사였으며 평화로운 시기가 오히려 예외적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 연구는 주로 서구와 그 주변 세계의 역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만약 비서구 세계를 모두 포함한 전체 세계사 차원에서 보면, 그나마 268년이라는 기간에도 실제로는 지구상 어디에선가는 늘 전쟁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결국 인류 전체 차원에서 보면 인간은 항상 전쟁과 함께 살아왔다는 것, 뒤집어 말하면 전쟁이 전혀 없는 완벽한 평화의 시대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보면 전쟁을 비정상 상태로 평화를 정상 상태로 보는 것이 어딘가 어색하지 않은가?
★ 평화주의의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평화주의의 역사는 전쟁이 항상 인류와 함께 해온 만큼이나 장구하다.
고대에는 평화주의가 특히 종교적 이상의 형태로 인류 앞에 나선 경우가 많았다. 대개의 고등 종교치고 평화의 이상을 설파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그 덕분에 평화가 확고하게 정착된 적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종교의 이름으로 참혹한 전쟁이 빚어진 경우가 많았던 게 진실이다. 구호와 실제는 늘 그렇게 따로 논다.
근대의 경우 철학자들이 눈에 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썼다. 칸트 뿐 아니라 근대 서구 계몽주의의 선구자들은 거의 모두 앞을 다투어 평화 정착을 위한 주의주장을 내놓았다. 공화주의자들은 야심에 들뜬 군주가 사라지면 평화가 올 것이라고 믿었고, 자유무역론자들은 국경을 넘어서는 무역의 자유가 평화를 앞당길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의 역사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매년 연말이면 노벨상이 세계의 주목을 끈다. 그중에 평화상이 있다. 노벨이 그 상을 제정한 이래 매년 빠짐없이 수상자가 나왔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지구상 어디에선가는 항상 크든 작든 전쟁이 있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모두 그 상이 등장한 이후 일어났다.
노벨 평화상은 앞으로도 계속 수상자를 내며 장구한 역사를 이어갈 것이 거의 틀림없다. 그러나 크든 작든 전쟁 또한 그럴 것임에 틀림없다. 전쟁 혹은 그에 준하는 갈등이 없으면 평화상이 이어질 까닭도 없다.
★ 전쟁의 역설, 외면할수록 그 위험이 커진다
평화를 그렇게 갈망해 왔으면서도 왜 인류는 전쟁을 그치지 못하는 걸까? 인간 본성의 문제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식의 접근은 실제로는 별 쓸모없는 순환논리에 봉착할 수 있다.
전쟁이 인간의 DNA에 뿌리박힌 본성이라면 전쟁 없는 평화란 문자 그대로 그냥 꿈일 뿐이다.
만약 결코 그렇지 않다면 인류 역사가 곧 전쟁의 역사라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본성, 본질 운운은 늘 그렇게 결론이 좀 허무한 경우가 많다.
보다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과 평화의 역설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쟁을 혐오하면 할수록 전쟁의 위험이 커지고 평화에 집착하면 할수록 평화의 실현은 오히려 멀어진다는 역설이다.
"당신은 전쟁에 관심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있다"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의 말이 날카롭다. “당신이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전쟁은 어떤 점에서 마치 스토커다. 마냥 피해 다니기만 하면 오히려 계속 따라 붙는다. 그러다 뒤통수를 보이면 어느새 목덜미를 낚아채듯이 닥쳐오는 게 전쟁이다. 물론 평화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이 점을 잘 잊는다.
2차 대전 직전 영국의 수상 체임벌린은 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해 히틀러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그 협정은 히틀러의 전쟁도발을 막는데 아무 쓸모가 없었다. 스탈린도 히틀러와 독소불가침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결국 소련을 공격했고 소련은 2천 만 명 이상이라는 엄청난 인명손실을 입었다.
평화의 구호는 천국처럼 달콤하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지옥을 각오하지 않은 평화의 외침은 오히려 지옥을 자초할 수도 있다. “천국으로 가는 길만 말하고 그리로만 가자고 하는 사람은 자칫 모두를 지옥으로 이끌게 될 수도 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의 말이다.
★ 유일하게 가능한 평화는 전쟁의 관리다
항구적 평화는 인류의 영원한 이상이다. 그러나 이상을 찬양하는 것과 그것을 이룩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전쟁이 영구히 제거된 절대적 평화는 실현가능한 이상이 아니라 하나의 꿈이다. 인간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이룰 수 없는 꿈을 아쉬워하는 詩가 아니라 실현 가능한 현실적 방안이다.
관점부터 바꾸어야 한다.
전쟁과 평화를 대립적으로만 생각하고 전쟁을 비정상 상태로 보아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역사는 전쟁이 인류에게 있어 피할 수 없는 일상이며 평화란 언제나 상대적이며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따라서 ‘전쟁의 완전 제거’가 아니라 ‘전쟁의 통제 관리’가 유일하게 실현가능하며 유의미한 평화일 수밖에 없다. 즉 평화의 항구성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그 위험을 관리하는 것이 바로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평화라는 것이다.
★ 평화의 역설, 믿지 않아야 가능한 오래 지속된다
강철같이 견고한 평화는 없다.
그것은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유리그릇과 다름없다.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유리그릇은 절대로 깨지지 않을 것이라 믿을수록 깨질 위험이 커진다. 그러나 언제라도 깨질 수 있음을 직시하면 오히려 깨질 위험이 낮아진다. 평화도 마찬가지다.
평화는 그것의 항구성을 믿지 않아야 오히려 가능한 오래 지속된다.
평화를 항구적이라 믿는 바로 그 순간 전쟁의 위험이 잉태된다. 그리고 그 믿음이 지속되는 동안 전쟁의 불씨는 알게 모르게 커져간다. 평화주의는 고매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평화를 지키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며 더러는 해악만 끼친다.
평화를 지키는 것은 평화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전쟁에 대한 각오다.
에드워드 기번은 名著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로마인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했다.” 평화는 언제나 무장평화다. 무장 없이 지켜지는 평화는 없다.
그래서 전쟁을 잊은 나라에는 평화가 없다.
★ 냉전시대의 역설, 무장평화가 열전을 억제했다
소련제국이 무너지고 냉전이 끝나자 세계는 본격적으로 불안정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세계 도처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평화의 시대가 오리라 믿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늘 그렇듯 순진한 기대였다. 냉전의 안전핀이 빠지자 곳곳에서 ‘안심하고’ 충돌에 돌입했다. 그리고 드디어 테러의 시대가 왔다. 대규모 열전이 아니기만 하면 괜찮을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오히려 냉전시대 자체가 어떤 의미에선 역설적으로 상대적 평화의 시대였다.
국지적 차원에선 몇몇 열전이 있었지만 1, 2차 세계대전에 비추어보면 제한적이었으며 횟수도 적었다. 동서 양 진영은 엄청난 수의 핵무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아니 그랬기에 오히려 서로 간의 열전을 자제했다. 相互相滅(상호상멸 Mutually Assured Destruction: MAD)을 초래할지도 모를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美蘇 양 강대국의 직접 충돌을 막고 있었다. 무장평화의 시대였다.
★ 정전체제, 전쟁 중임을 잊고 있었다
6.25 이후 60년 가까이 정전체제가 지속되고 있다. 이 시대는 과연 평화의 시대일까 전쟁의 시대일까? 한편으로는 평화, 또 한편으로는 전쟁의 지속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시대를 평화시대라 할 수 있다면 오직 무장평화라는 점에서만 그렇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전쟁 중에 있다는 것이 정답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이 점을 잊고 지냈다. 경우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
북한이 도발할 때는 애써 전쟁 중이 아니라 믿고 싶어 했고, 북한에 퍼주고 싶은 자들은 애써 긴장완화의 필요성만 강조했다. 때로는 마치 전쟁위험이 전혀 없는 평화 속에 살고 있는 듯 태연히 행동하고, 때로는 전쟁이 무서워 최소한의 대응도 회피하는 투항주의적 평화주의에 기울었다.
통일을 말할 때도 자유민주라는 내용을 자신 있게 내걸기 보다는 평화적이라는 방법에만 몰두했다. 대화, 교류, 협력 등등 대북정책의 전면에는 항상 이런 구호만 내걸려 있었다. 남북관계에선 평화라는 구호가 모든 것에 앞서는 가치가 되고 있었다.
★ 먹구름은 햇볕 아래서 만들어진다
돈 있고 배부른 자가 범하는 가장 큰 착각이 자신의 안전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땡강 부리는 양아치 조폭은 돈이나 몇 푼 집어주며 달래는 게 최상이다, 그러면 결국에는 못된 짓거리를 중단하고 개심할 것이다, 이런 식의 믿음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지킬 실력과 응징의 각오를 분명히 하지 않는 돈 자랑은 오히려 유혹만 부추길 뿐이다.
햇볕 정책이라는 것이 있었다. 한 때 예비군 폐지를 외쳤던 者가 주창한 것인데 그는 덕분에 노벨 평화상을 탔다. 그러나 이 나라는 그 상의 대가로 핵무기를 머리에 이고 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뢰 한 방까지 덤으로 받았다.
햇볕이라? 실효성 없는 정책일수록 수사학만 현란하다.
그럴듯한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했지만 그것은 그냥 이솝우화의 얘기다. 실제세계에선 여름날 햇볕 속에서 먹구름이 자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천둥 번개와 함께 폭풍우가 몰아친다. 그것이 과학적 법칙이다.
평화의 착시가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천안함 사건은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우리에게 가능한 평화란 불가피하다면 전쟁을 각오하면서도 단지 그것을 통제 관리하는 것 이상일 수 없다. 이것을 깨닫지 않으면 오히려 위험이 더 커지고 평화는 더 멀리 달아난다. 싫어도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 평화운동, 좌익의 정치적 무기가 되다
평화주의가 평화를 이룩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평화주의자들은 끊임없이 등장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평화주의의 계보를 살펴보면 현대에 들어와 등장한 특이한 현상 하나가 눈에 띈다. 러시아 혁명 전후 시작돼 사회주의권의 등장과 더불어 퍼져나간 흐름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의 주요 기치의 하나가 “제국주의 전쟁 반대”였다. 레닌은 나아가 “적국이 아닌 자국의 부르주아를 공격하라”는 이른바 혁명적 패배주의를 내걸었다. 전쟁 반대라는 평화의 구호를 혁명의 정치적 무기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등장한 정치적 무기로서의 평화운동은 냉전시대에 들어서면서 그 비중이 더욱 커졌다.
냉전시대는 곧 핵시대였다. 치명적 대량살상무기인 핵무기로 공포의 균형이 유지되며 열전이 억제되던 시대였다. 그러자 반핵평화운동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 운동은 사회주의권이 아닌 오직 자본주의권에서만 일어났다. 좌익운동가들이 자본주의권을 공격하는 정치적 무기로 반핵평화를 내건 것이다.
반핵평화운동은 냉전시대 내내 서방진영을 내부에서부터 교란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소련은 그런 부담 없이 마음 놓고 핵무장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면서도 항상 입으로는 평화를 말했다.
히틀러도 평화를 운운했으니 놀랄 일은 아니다.
★ 평화주의자, 순진하거나 혹은 불순하거나
순수한 이상주의적 평화주의자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대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려진 비밀이었다. 더욱이 이상주의자들은 반핵평화운동을 계기로 좌익으로 경도되기 다반사였다. 그들은 소련의 수용소군도는 애써 외면하고 오로지 자신이 살아가는 자본주의 세계만 공격했다. 그들은 그것을 지식인의 양심이라 믿었다.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가 훌륭히 작동한 셈이다. 사회주의권은 결국 무너졌지만 냉전시대의 정치투쟁이라는 점에서만 보면 그들이 훨씬 성공적이었다.
냉전시대의 평화주의자는 둘 중의 하나였다. 순진하거나 아니면 불순하거나!
순진한 이상주의자들은 인류역사상 평화의 ‘구호’가 평화체제를 정착시킨 적이 없었다는 점을 모르고 있었다. 불순한 자들은 물론 그런 이상은 믿지 않았다. 그들에게 평화운동은 체제전복의 전략 전술적 도구였을 뿐이다.
한국은 어떤가? 6.15 선언과 10.4 선언은 순진함의 결과였을까 불순함의 결과였을까?
북한은 그 선언의 뒤에서 핵무기를 만들었으니 불순함을 따질 필요도 없겠다. 그렇다면 남쪽의 당사자인 김대중, 노무현의 경우는 어떨까?
★ 두 개의 전선, 하나의 전쟁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6.25부터 이번 천안함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그 어떤 잘못도 저지른 적이 없다. 모든 것은 미제와 그 주구인 남조선의 음모일 뿐이다. 그들은 원래 그런 者들이라 치자.
그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남쪽의 대변인 무리들은 뭔가?
이들은 미군기지에 대해선 난리를 치지만 북한 핵에 대해선 입도 뻥긋 않는다.
천안함 사건에 시종 북의 변호사 노릇을 하더니 결코 범행을 부인할 수 없는 조사 결과에도 딴 소리다. 그러면서 지금은 도리어 우리 정부와 군에다 대고 욕을 퍼붓는다.
순진해서일까? 아니면 불순해서일까?
대화, 교류, 협력, 따위의 구호를 시종 입에 달고 다니며 평화를 자신만의 전매특허처럼 과시하는 자들이 있다. 순진한 것일까? 불순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불순한 무리들은 언제나 가면을 쓴다는 것이다. 늘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그렇게 내버려두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전쟁 중이다. 안팎으로 그렇다.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한 무리는 핵을 들고 어뢰를 쏘고, 또 한 무리는 가면을 쓰고 후방 교란을 하고 있다.
어떻게 평화를 지킬 것인가? 대화? 협상? 교류? 아니다.
두 개의 전선에서 모두 이기기 전에는 대한민국에는 가능한 최소한의 평화도 결코 없다.
- 뉴데일리사 글에서 /newdaily.co.kr-